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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 집회(교조 신원 운동)
동학 교조인 최제우가 처형되고 동학이 탄압받자 2대 교조인 최시형을 중심으로 교세가 확산되었다. 동학교도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
보은 집회
전라도 보은에서 교조 신원, 탐관오리 숙청, 외세 배격 등을 함께 주장하였다. 정치/사회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
서울 복합 상소
서울에서 복합 상소 운동을 전개하였다. -
고부 농민 봉기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만석보 사건 등)로 인하여 전봉준이 사발통문을 돌려 농민을 모은 뒤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정부는 조병갑을 해임하고 새로운 군수를 임명했고, 농민들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가 동학교도와 농민을 탄압하여 제1차 동학 농민 봉기가 발발하게 되었다. -
일본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 발발
전주화약의 체결 이후 정부가 청과 일본에 철군을 요청했으나 일본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후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
제1차 농민 봉기
이용태의 탄압으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고부 백산에서 농민군 조직하여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천명했다.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촌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정부는 청에 파병 요청을 했고, 톈진 조약으로 인해 일본도 출병했다. 농민군은 외세의 개입을 우려하여 정부의 개혁 추진을 조건으로 전주 화약을 체결했고, 자치적 개혁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했으며 신분제 폐지, 토지 분배 등을 목표로 폐정 개혁안을 시행했다. 정부는 농민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개혁 기구인 교정청을 설치하고 청과 일본에 철군을 요청했다. -
제2차 농민 봉기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 간섭을 심화하자, 전봉준, 손병희가 각각 이끄는 농민군이 연합하였다.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섰으나 패배하여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일본은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를 체포하고 농민군의 잔여 세력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의 의의는 농민이 주축이 되어 외세에 대항하고 근대 사회로 전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
제1차 갑오개혁
일본의 내정 개혁 강요로 인해 김홍집 내각은 개혁 추진 기구인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교정청을 폐지했다. 정치:왕실의 정치 참여를 막기 위해 정부 조직을 왕실 사무 총괄하는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누었다. 또한 6조를 8아문으로 편성했고, 청에 대한 사대외교를 폐지했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경무청을 세워 경찰제도를 마련했다. 경제:부정부패 예방을 위해 재정 업무를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하였다. 일본에 맞춘 은 본위 화폐 제도를 시행했으며 도량형을 통일했다. 세금을 돈으로 내는 조세 금납화도 시행하였다. 사회:신분제와 노비제를 폐지했고 연좌제를 폐지했다. 또한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주장된 신분제 폐지가 포함되었다. -
Period: to
제2차 갑오개혁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유리해지자 개혁에 적극 간섭했으며, 고종이 자주 독립 및 개혁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려는 뜻으로 홍범 14조를 반포했다. 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박영효/김홍집 연립 내각이 주도했다. 정치: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치고 8아문을 7부로 고쳤다. 지방 8도를 23부로 개편하고, 재판소를 통해 근대적 사법 제도를 도입했다. 교육:교육입국 조서(고종이 교육의 중요성을 말함)를 반포했고, 한성 사범 학교를 설립했으며, 외국어 학교를 설립했다. -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을미사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1)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국임을 인정
2)일본에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할양
3)배상금 2억 냥 지불 일본이 랴오둥반도에 진출하자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저지했고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포기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조선 내에 친일파가 실각되고 친미, 친러 내각이 들어서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일본은 이후 내정 간섭을 통해 친일 내각을 다시 수립하고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을 추진했다. -
을미의병
이소응 등 유생층이 주도하고 동학 농민군 잔여 세력이 가담한 항일 의병 운동이다.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운동이나, 고종의 단발령 철회 및 해산 권고로 유생 의병장 대부분이 활동을 중단했다.
일부 농민들과 하층민들은 남아 활빈당 등의 무장 조직을 만들어 투쟁을 지속했다. -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김홍집 내각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정치:건양 연호 사용 군사:한성에 친위대와 지방에 진휘대를 설치했다. 사회:태양력 채택, 단발령을 시행했으며 종두법을 시행했다. 단발령에 반발한 백성들이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갑오개혁의 의의는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군의 요구가 일부 반영되었다는 것과 독립 협회/애국 계몽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지만, 일본의 간섭 속에 추진되어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군제 개혁과 토지 개혁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
아관파천
을미사변으로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을미개혁이 중단되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
독립신문 발간&독립협회 창설
러시아의 간섭 및 이권 침탈이 심화되자 서재필이 정부 지원을 받아 최초의 한글 및 영자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또한 개혁적 관료들과 함께 독립문 건설을 위한 독립협회를 창설한다.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 영접하던 영은문 위치에 독립문을 건립하고, 중국 사신 접대하던 모화관을 수리하고 독립관이라 명명했으며,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었다. -
Period: to
독립 협회의 활발한 활동
1)만민 공동회 개최
1898년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 철회, 러시아 군사 교련단과 재정 고문 철수, 한러 은행 폐쇄를 주장했고 전부 수용되었다. 2)자유 민권 운동 전개
법률에 따라 신체의 자유, 재산권 보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요구했다. 3)의회 설립을 통한 국민 참정 운동 전개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한 독립협회는 의회(중추원) 설립 요구를 통해 개혁적인 박정양 내각을 수립하였다. -
대한 제국 수립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고조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던 시기, 러시아와 일본 간의 세력 균형으로 자주독립 추진이 유리해지자 고종은 아관파천을 끝내고 환궁하며 자주독립을 추진하였다. 고종은 칭제건원하며 연호 '광무'를 제정하고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변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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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의 수립&광무개혁
고종은 대한국 국제 반포(1899)를 통해 황제에게 군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등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다. 또한 광무개혁(1897~1904)을 통해 여러 개혁을 실행하였다. 군사:국방력 강화를 위해 황제 직속의 원수부(=국방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중앙과 지방의 군대를 통솔할 수 있게 하였다. 경제:양전(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하여 국가 재정 증대를 위해 양전을 시행했으며, 토지 소유권 증서인 지계를 발급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권(=세금)을 확립했다. 또한 식산흥업 정책(상공업 진흥 정책)을 통해 근대적 회사와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한성은행 등 민간 은행을 설립했다. 마지막으로 근대 시설을 도입하여 전화, 전차, 철도 등을 부설했다. 교육:기술과 실업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유학생을 파견했다. 외교:한청 통상 조약 체결을 청과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했다. 구본신참(옛 것을 근본으로 새로운 것을 참고한다)을 원칙으로 삼은 점진적인 근대화 개혁이었다. -
광무 개혁의 의의(날짜 x)
광무개혁은 단기간에 산업, 교육, 근대 시설을 확충했지만 황제권 강화에 초점을 두느라 민권 보장에 소홀했고, 외세 의존적이었기에 열강의 이권 침탈을 가속화했다. -
독립 협회의 해산
정부 대신들까지 참석한 관민 공동회가 개최되어 황제에게 건의할 헌의 6조를 채택하였고 고종은 헌의 6조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성장을 두려워한 보수 관료들이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시행하려 한다는 말로 고종과의 사이를 이간질시켰다.
고종이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며 해산시키자 만민 공동회를 열며 항의가 있었으나 보부상 중심의 황국협회를 동원해 만민 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독립협회 활동은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고 했으며 민중 계몽을 강조했고 민중 기초한 근대화 운동을 전개했다는 의의가 있으나 미국과 일본 등 열강에 우호적이었기에 열강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
Period: to
러일전쟁
대한 제국이 국외 중립 선언(1904.1.) 등이 있었으나 큰 영향은 없었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격화되자, 일본은 러시아의 아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선전포고한다. 일본은 대한제국에 강요하여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는데,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일본에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에서 유리해진 일본은 제1차 한일협약도 체결하여 고문 정치를 시작한다. 일본은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화폐정리사업)와 외교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파견한다. 일본이 대마도 앞바다에서 발트 함대를 격파하여 승기를 잡았고,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 영국과 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반도 지배권을 승인받는다. 1905년 9월, 일본은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아 전쟁이 종결된다. 또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랴오둥 반도 조차권, 남만주 철도 양도, 사할린 남부를 할양받았다. -
을사의병
을사늑약 이후, 유생 최익현의 주도로 일어났다. 이후 최익현은 체포되어 대마도에 끌려갔으나 단식 끝에 아사하여 순국한다. 최초의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은 평해, 울진 등지에서 크게 활약했다. -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한다. 러시아, 미국, 영국 등이 한성에서 외교 대표를 철수하고, 일본은 대한 제국의 외교 업무 담당을 위해 통감부(초대 통감:이토 히로부미)를 설치했다. 그러나 을사늑약은 공식적 명칭이 없고 고종의 비준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에 국제법상 무효인 조약이다. 을사늑약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항일 운동이 확산되었다. 국내의 경우 민영환과 조병세 등이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했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했다. 나철과 오기호등은 오적 암살단을 조직해 을사늑약에 동의한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재명은 이완용을 칼로 찔러 거의 살해했으나 실패했다. 국외의 경우 전명운과 장인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제1차 한일협약의 스티븐스를 사살하고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후 뤼순 감옥에서 동양 평화론을 집필하고 순국했다. -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이 헐버트를 파견하여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가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이후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보냈으나 효과과 없었고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킨 후 순종을 즉위시킨다. -
정미의병
정미7조약에 반발하여 일어난 의병이다. 해산 군인이 합류하여 전투력이 올랐으며, 유생, 농민,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대일 의병 전쟁의 성격을 띄었다. -
서울 진공 작전
전국 의병들이 집결하여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일제에 의해 실패하여 반격으로 남한 대토벌 작전이 실행되었다. -
남한 대토벌 작전
일제는 서울 진공 작전의 보복으로 호남 의병 출몰 지역을 대규모 공격하여 의병을 학살하고 양민을 살육했다. 이로 인해 국내 의병 활동이 위축되었고 의병 활동의 근거지가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했다.